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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2020년 1월 19일 주일설교_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2020-01-19 15:53:44
전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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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성 경: 요한복음 1:29-39

설교자: 원영만 목사

설교일: 2020. 1. 19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35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39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복음 1:29-39

 

   

거룩한 주일 하나님 전에 나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말씀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그린 성화들을 보면 그의 손가락은 언제나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제나 주님의 증인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을 향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손가락이 우리 자신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 손을 들어 주님을 향하고 저분을 보라. ‘저분이 바로 구원자’이다. 증인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셔서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요한은 예언자들이 말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대로 예수님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전에는 몰랐다고 했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는 그를 몰랐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했습니다.

 

구원은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아는 것입니다. 예수가 구원이심을 알고 예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는 분들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분들은 갈한 마음으로 겸손히 주님께 간구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인내하다 보면 언젠가 ‘이제는 나도 알았네?’ ‘주님이 바로 구원이시구나!’ 깨닫는 때가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눈이 열린 세례자 요한은 주님이 보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던 주님이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매우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성령은 안경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초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분명하게 보고 확신 있게 증언합니다. ‘보라! 저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36)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심을 보고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하였고, 그 두 제자는 주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보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라틴어로도 유명한 단어입니다.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나님의 어린 양, 그렇다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듣는 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하면 떠오르는 느낌이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아리랑 고개’하면 무슨 말인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느낌이나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습니다. 설명이 필요하고 설명을 잘해 주어야 어느 정도 그 느낌을 이해하게 되지요. 우리 민족에게 ‘양’은 그렇게 친근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살면서 송아지, 소, 염소, 돼지, 개는 자주 보았습니다. 산토끼나 고라니도 익숙하고 친근합니다. 그러나 양을 본 적은 없습니다. 춘천에 올라가서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양’이 처음입니다. 한 가톨릭 수도원에서 양을 키웠는데 큰 도로 옆에 있어서인지 늘 새까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양 몇 마리가 처음 본 양입니다. 양을 볼 기회가 많지 않기에 대관령 양 떼 목장에는 늘 관광객이 많습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뉴질랜드 인구보다 몇 배나 많은 양들이 살고 있기에 양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양을 볼 수 있는 나라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렇지 못한 문화나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유목문화입니다. 늘 양 떼를 가까이하는 생활방식입니다. 특별히 ‘어린 양’하면 그들은 누구나 번뜩하면서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살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이삭이 자라나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명하신 곳으로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함께 가던 종들에게 여기서 기다리라 하고는 계속해서 길을 걷습니다. 이삭은 등에 번제에 사용될 나무장작을 메고 있었습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22:7)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것이다.’(8) ‘하나님이 손수 어린 양을 마련하신다.’ 창세기에서부터 앞으로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의미하거나 향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곳에 이르는 아브라함은 아들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려고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숫양 한 마리가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아들 대신 하나님께 번제로 드립니다.’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신 양으로 아들 대신 드린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받고 하늘의 약속과 하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어린 양’은 대신 드린 제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할 때 먼저 드는 생각은 대신 죽임당할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하면 이 의미가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때 일어난 일입니다. 유월절, 억압받던 애굽에서 탈출하던 바로 그 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그곳에 임하였습니다. 첫 번째 달 14일, 유월절은 애굽에게는 무서운 멸망의 날이요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 파멸로 뒤덮인 날이었습니다. 이 무거운 심판의 날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피할 길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앞으로 오실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에게만 파멸과 심판의 날이요 두렵고 무서운 진노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같은 날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떻습니까? ‘믿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믿어야 그날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은 일 년 된 숫양이나 숫염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 일 전, 즉 1월 10일에 흠 없는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여 놓고 14일 오후에 모든 이들이 모여 함께 그 양과 염소를 죽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받아 자신들이 머물 집의 문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바릅니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가 그곳에서 머물면서 쓴 나물과 함께 그 양을 먹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유월절 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입니다.

 

그날 밤 죽음의 사자가 온 애굽 땅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고 유월절 양을 함께 먹던 이들의 집은 그 죽음의 사자가 뛰어넘었습니다. ‘패스 오버’, ‘패스’한 겁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했습니다. 그날 애굽 땅에 있던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장자가 죽어 비탄에 빠지던가? 아니면 장자의 죽음을 피하고 그동안의 모든 억압에서 구원을 받던가? 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 두 그룹의 차이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이 어린 양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이 두 그룹을 갈라놓은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하면 유대인에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죽임당하는 제물, 그리고 ‘피 뿌림’입니다. 어린 양은 대신 죽을 제물이 된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할 때 그들은 바로 그가 앞으로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임당할 것이며 그의 피 흘리심과 그 피를 뿌림으로 인해 죄에서 정하게 되고 모든 저주와 죽음, 파멸에서 구원되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떠올렸을 것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신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인해 죄에서 자유케 되었듯 우리도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에 뿌려라(히10:22,벧전1:2) 어린 양의 피 뿌림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벧전1:2) 주님께서 계신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오직 예수의 피로만 가능합니다.(히10:19)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의 유월절 양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 분명히 말씀합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에는 구원의 날이요 애굽에는 파멸의 날이었듯, 지금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느냐에 따라 구원과 파멸이 나누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인간의 죄를 제거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히10:8-14)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이 땅에 친히 오셨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성경의 마지막 계시록에서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28번이나 등장합니다. 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이미지는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4장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사로잡혀 그 열린 하늘 문을 넘어 높이 올라가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게 됩니다.(4:2) 그곳에는 높이 들린 하늘 보좌가 있었고, 그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안팎으로 글씨가 쓰여있는 두루마리였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굳게 봉인되어 있었는데(5:1), “누가 이 봉인을 뗄 수 있는가?”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런데 그 봉인을 풀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5:3)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어서 사도 요한은 울어버립니다. 너무 슬펐기 때문입니다.

 

울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장로 중 하나가 다가와 ‘울지 마세요.’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가 되시는 그분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일곱 인을 떼고 그 두루마리를 펼쳐내실 수 있습니다.(5:5) 그리고 사도 요한은 ‘내가 보니’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6) 했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 일곱 뿔과 일곱 눈, 즉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 달려 있는 ‘어린 양’입니다. 하늘 보좌 주위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는 금 대접을 들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려집니다. 금 대접에 담긴 향은 ‘성도들의 기도였다’(8)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양을 찬양하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9-10)

 

죽임당하신 어린 양께서는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외칩니다. 모든 피조물도 함께 외칩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하도록 받으시옵소서.(13) 하늘 보좌 주위의 네 생물이 ‘아멘’하고 화답하고, ‘장로들은 엎드립니다.’ 어린 양께서 일곱 봉인을 떼어내십니다. 그때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셀 수 없는 무리가 종려나무를 들고 보좌 앞 어린 양 앞에서 서 있습니다.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7:10)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우리 동료들은 어린 양의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씀’을 힘입어 악마를 이겨 냈다.’(12:11)

 

사랑하는 이들이여, 주의 보혈과 말씀으로 악마를 이기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보혈을 마음에 뿌려 구원을 받고 말씀을 증언하면서 어둠의 영을 이기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으로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도 없고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14장 1절에는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 있었다’ 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는 늘 ‘어린 양’이 보였습니다. 21장에 보좌에 앉으신 이는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21장에는 해와 달의 빛이 필요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의 등불이 도성을 비추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어린 양은 ‘등불’입니다. 해보다도 더 밝은 빛입니다. 천국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이 ‘어린 양’입니다. 천국 자체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이가 복 있는 자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19:9)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음과 그렇지 못함 사이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유월절 양을 잡던 유월절 오후에, 유월절 양은 뼈가 꺾이면 안 된다는 예언대로 뼈가 꺾이지 않으신 채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돌아가셨습니다.(출12:46,민9:12,요19:36)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이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어린 양의 피 뿌림 만이 우리의 구원이다(벧전1:2) 믿음으로 외쳐야 하겠습니다.

 

계시록에서 유대 지파의 사자가 곧바로 어린 양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자’이시며 ‘어린 양’이십니다. 승리하시는 사자 되십니다. 그러나 사자처럼 힘으로 이겨 완력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하신 구주이십니다. 그러나 힘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죽으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2)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병들어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는 멸시를 받았고,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3)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습니다.(4)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 누리고, 그가 매 맞음으로 우리 모든 병이 나았습니다.(5) 우리들은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케 하셨습니다.(6)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셨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7)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죄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서신 것입니다.(12)

 

오래전 이사야의 예언은 이 땅에 오셔서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다’를 영어로 ‘take away’라고 합니다. 멀리 옮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에는 ‘제거하다, 없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마구간 같은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이끌고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죄’ 있는 모습 그대로는 못갑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거룩한 곳이라 부릅니다.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의 영, 사악한 영의 영향이 있습니다.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오신 주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를 멀리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친히 이루셨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은 그분의 피로 정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계셨지만,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세례 요한만이 ‘보라 여기 하나님의 어린 양이 계신다’ 알아보았습니다. 어린 양을 알아보고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환영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어린 양을 찬양하십시오. 그 어린 양을 바라보며 그분 앞에 엎드리십시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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