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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2020년 2월 2일 주일설교_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2020-02-02 17:19:40
전미숙
조회수   357

주일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성 경: 마태복음 5:1-12

설교자: 원영만 목사

설교일: 2020. 2. 2

 

 

 

1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심령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1-12

 

 

 

거룩한 주일 하나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이나 오랜만에 방문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말씀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에게 ‘천국’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인류가 체험할 수 있게 된 하나님의 다스림,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다양하게 예언하신 바로 그 축복의 때가 드디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축복의 천국을 어느 특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의 복음이 복음 될 수 있는 것은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복음이지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를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를 붙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혹시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는 것은 아닙니까? 천국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주머니를 만지시면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시지요. 마음들을 들여다보세요. 목마름이 있습니까? 간절함, 주님을 향한 간절한 배고픔이 있습니까? 그러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셨다’ 했습니다. 여기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신 것입니다. 그곳까지 찾아와서 생명의 말씀 들으려는 목말라하는 그들의 가난한 심령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입을 여시사 가르쳐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니라” 하였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이 있나니’ 이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이(μακαρίοί)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아쉬레이(אַשְׁרֵי)의 번역입니다. 아쉬레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체험한 사림들이 체험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는 기쁨(unexpected joy)이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노라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빼앗지 못한다 하였습니다.(요16:22)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 어떤 상황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이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여기에서 사용되는 단어 가난은 ‘프로코스’(πτωλος)인데 이는 정말 심각한 가난을 말합니다. 성경에 다른 가난도 있습니다.(고후9:9) 페네스(πενης)인데 ‘프로코스’는 일반적인 가난보다 훨씬 심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20-21)에서 거지 나사로의 가난함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 생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수준의 극심한 가난입니다. ‘나사로’ 그 단어의 뜻 자체가 하나님, 도움이라 했지요. 하나님이 도우셔야 살 수 있는 사람, 도울 이가 오직 하나님뿐인 사람이 바로 나사로입니다. 그는 절대적 빈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과부의 가난을 표현할 때도 ‘프로코스’를 사용했습니다. 전 재산이 두 렙돈인데 그 전 재산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제 그 과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가난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가난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아니하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도움 받을 수 없는 가난입니다. 자신의 절대적인 빈곤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가 간절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이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정말 가난한 자입니다. 성경이 쓰여질 당시 쿰란공동체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 즉 자신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이 의미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이들입니다.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잘 압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바라보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그분의 은총만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하늘 가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유일한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 가는 길의 그 첫 번째가 ‘가난’입니다. 무엇보다 ‘가난함’이 먼저입니다. 가난은 참된 행복의 첫걸음이라 했습니다. 가난은 겸손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심정을 가진 자가 가난한 자요 겸손한 자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자신의 안팎의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또한 자신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무능함 철저히 깨닫고, 오직 주님만을 붙드는 자가 가난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온유한 자와 연결됩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자신의 죄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가난함 가운데 주님을 바라봄이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에서 ‘온유’는 ‘프라에이스’(πραεὶς)인데, 이는 히브리어, ‘아나윔’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1장 1절에서는 이 단어가 ‘가난한 자’로 번역됩니다. ‘아나윔’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시37:11) 하나님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아나윔’입니다. 온유는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가난함, 곤고함과 핍박과 환란 가운데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에요. 가난함과 주님을 바라봄이 이 둘이 함께 있는 자가 온유한 자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매우 온유하였습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온유하였다고 민수기 12장 3절이 말씀합니다. 바로 ‘아나윔’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자 아론과 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모든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다. 온유는 가난이에요. 그러니 그는 가난한 자와 보잘것없는 자다. 이 뜻이에요.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무엇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는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된 것은 나의 부르심 때문이요 내가 준 사명 때문이다. ‘모세에게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모세’인 것이다. 그의 부족함을 책잡지 말아라. 그것 붙들고 늘어지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우라’(마11:29)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 겸손합니다. 온유, 겸손은 같은 말입니다. 그 말의 뜻은 가난입니다. ‘프라에이스’가 때로는 가난, 때로는 온유, 때로는 겸손으로 번역됩니다. 그는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셨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9:9-10)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 타고 오신다.(마21:2-5,요12:15) 여기에서 겸손이라는 말이 가난과 같은 단어인 프라에이스’입니다. 나귀는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짐승입니다. 

 

성경에서 가난, 온유, 겸손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으셨지요. 마지막까지도 없으셨습니다. 나귀도 빌린 나귀입니다. 나귀 하나 없으신 가난한 분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가난했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 마음은 온유, 겸손하다.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깨끗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방처럼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거치적거리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곳에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때로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삐뚤어지고, 굳어지고, 고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기에 무엇이나 움켜쥐려고 욕심도 부리고, 하나님을 잊고 사람의 소중함도 잊어버리고 물질만을 차지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온유 ‘아나윔’은 가난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평화와 쉼이 있습니다. 문제가 그들을 삼키지 못합니다. 굳어지게 못합니다. 사납게 만들지 못합니다.

 

다윗은 시편에 주께서 주의 구원하시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고 했습니다.(시18:35,삼하22:26)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두려워하는 그에게 주님의 온유함이 그의 마음을 넓게 크게 해주신 것입니다. 온유함은 가난이에요.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철저히 아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주님을 바라봄이에요. 주님만을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요. 그 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온유함이 마음에 입혀질 때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문제해결을 받게 됩니다. 내가 약한 그때가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바로 이 뜻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 겸손의 마음은 믿음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입니다. 늘 주님을 믿기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밖에 없기에 상황에 따라 요동함이 없습니다.

 

가난, 온유가 없을 때 애통해야 합니다. 멍하니 있으면 안 됩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 애통 ‘펜툰테스’(πενθουντες)는 정말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애통할 때 그 애통을 펜툰테스라고 했습니다.(창37:34) 자신의 옷을 찢고 마음속의 아픔을 삭일 수가 없어서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을 표현할 때 그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애통’입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해야 합니다. 

 

아들 요셉을 잃은 아버지 야곱이 애통하듯 애통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내 능력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알고 애통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내 삶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애통해야 합니다. 피로 온통 물든, 다 찢어진 옷을 가지고 ‘이것이 요셉의 옷입니다. 아버지’하고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왔을 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비통함에 울며 부르짖는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애통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보며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눅23:28) 하였습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나와 나의 자녀를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지고 갈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빈손으로 밖에 갈 수 없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그 빈손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그 손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을 펴는 것이 가난이요 애통함입니다. 손을 웅크리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손을 들어 손을 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도움이십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이요. 애통이며, 온유입니다.

 

거지 나사로, 주님만이 나의 도움 되신다. 나사로, 하나님이 도움 되신다. 애통하는 자에게 열리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마음이 부하면 안 되겠습니다. 가난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의에 목말라야 합니다. 주님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께 나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분을 그리워해야 합니다.(단9:23) 눈앞에 있는 것에만 만족하거나 또는 실망하지 말고 눈을 들어, 보다 높이 계신 위대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이번 주 우리 교회는 ‘심령대부흥회’를 갖습니다. 성경에도 정기적으로 ‘성회’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평상시는 각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특별히 ‘성회’로 모이는 것은 심령의 가난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시간과 축복의 장소에서 약속하신 대로 부어주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사모하며 목마름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예로부터 ‘심령대부흥회’라 했습니다. 

 

먼저 심령에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내 심령’에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부흥은 리바이벌 revival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소생하는 것입니다. 심령부흥을 위해 사모하십시오. 특별히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 하였습니다. 배부른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원함이, 간절함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배부른 자를 성경은 교만한 자라 합니다. 배고픈 자를 성경은 겸손한 자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열립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천국이 열립니다. 가난함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온유한 자에게 천국이 열립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에게 천국이 열립니다. 천국을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작전동교회 모든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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