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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2020년 2월 16일 주일설교_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신다
2020-02-16 13:10:06
전미숙
조회수   66

주일설교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신다

 

 

성 경: 마태복음 5:21-37

설교자: 원영만 목사

설교일: 2020. 2. 16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태복음 5:21-37

 

 

거룩한 주일 하나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이나 오랜만에 방문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신 본문의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신다!』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즉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왔고’ 그때 들려주신 설교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신 설교 말씀이기에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은 시내산에 오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율법을 내려 주시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리에는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이시며 그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주님은 율법의 해석자로 그곳에 앉으셔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전의 제단은 ‘돌’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제단을 처음 쌓을 때 계양산에서 성도들이 돌을 하나씩 가져다가 쌓아 만들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자신이 가지고 온 돌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요즘 저는 돌로 되어 있는 이 제단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시는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시는가? 귀를 기울여 들어보기도 합니다. 지난주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녹음하고 다시 들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 통해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매 순간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심을 깨닫고 그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는 하나님을 다시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먹고 사는 문제, 근심과 걱정의 문제,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고 있는 모든 문제들, 그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언제나 함께하심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는 모든 것,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놓치기 쉬운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기도와 금식, 구제,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것, 능력을 행함, 전도, 치유, 이러한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시선을 다른 어떤 곳에 빼앗기지 말고 언제나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면서 그분을 지향하면서 그분을 그 자리에 초대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가 계신 것과” 했습니다. 모든 곳에 현존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모든 곳에는 변함없이 한결같이 계십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자리,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자리, 신음하는 자리, 가슴 아파하는 자리, 몸과 마음이 병들어 떠는 자리에도 그분은 한결같이 계십니다. 주를 위해 일하는 자리,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기도하는 자리에도 계시고 운전할 때도, 음식을 준비할 때도, 멀리 나가 일할 때도, 군대에 가 있을 때도 그곳에 변함없이 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 깨닫습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소서.’ 영성가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1923-2018)의 기도입니다. 저의 기도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기도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옵소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우리가 순간 잊고 있었던 하나님을 다시금 보게 합니다. 인식하게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함께하심이라.”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온전한 사랑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곳에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걱정거리로, 두려움으로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달아 아는 순간, 주님이 보이는 그 찰나의 순간 눈 녹듯, 안개 사라지듯 우리를 억누르던 두려움과 염려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산상수훈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산 위 바위에 앉아 말씀하고 계시다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머리 빈 놈, 돌대가리, 멍청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내려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서 옥에 가둘까 염려하여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예수님의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려는 것 같이 사실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말한다 마음의 살인, 즉 분노가 이미 살인이다.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그것 자체로 공회,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갈 일이고, 사형을 언도하는 그곳에서 사형을 당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큰 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청년 때 제가 오랜 기간 머물었던 어떤 곳에 어떤 분이 조용히 저에게 다가와서 얘기를 하나 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 ‘사람 죽인 사람이야!’ 그 이야기를 하는 이도, 또 그 이야기를 듣는 저도 순간 섬뜩했습니다. ‘아니 왜요? 어떻게 하다가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났나요.’ ‘고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암튼 그 일로 형을 살고 나왔어.’ ‘살인’ 무섭지요. 그러나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았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래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청년 시절 방황을 많이 하고 험하게 살았던 분이 계셨는데 후에 믿음을 갖고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게 “목사님! 제가 소싯적에 험하게 살았지요. 그래도 말입니다. 사람은 안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원하는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부분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너의 마음으로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어!’ 하는 순간 너는 이미 살인자다 그 살인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으로 ‘저 멍청한 인간’, ‘머저리’, ‘몹쓸 인간’하고 욕하는 순간, 너는 거기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 심판의 형은 지옥 불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또 죽임이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로 짖지 않아도 너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음욕 그 자체가 이미 ‘간음’이다. 또한 아내를 버리기 위해 이리저리 온갖 방법을 쓰는 것, 율법에서는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허용되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율법을 너의 의도를 이루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욕구를 이루려고 할 때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을 때 율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계획과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맹세도 그렇습니다.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한다 하였지만 ‘아니다’ 너는 네가 맹세한 말뿐만 아니라 너의 모든 말을 다 지켜야 한다.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키고 저것은 그냥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네게 한 모든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구약에 기록된 율법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 새로운 율법은 더욱 어렵습니다. 아니 전혀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과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 적당히 율법을 지켜놓고서는 그 정도에 만족하는,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것은 불가능하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산상수훈의 말씀이 새롭고 의미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웨슬리 목사님의 산상수훈 13편의 설교를 정리하고 또한 성도들과 함께 매 주일 오후에 그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산상수훈에 관한 여러 좋은 책들이 있다는 것을 요즘에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설교가인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의 산상수훈 책에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어로는 ‘Life can Begin Again’ ‘다시 시작할 수 있어’입니다. 지금부터는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정리하고 또 나름대로 제가 묵상한 부분을 첨가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려면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위험하고 무섭고 두려운 자리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누구나 그 자리를 통과해야 합니다.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서야 하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전혀 감출 수 없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 시선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 없이는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잠시라도 나 자신을 그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율법에 나 자신을 비추어본다면 나의 실체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그 두려움의 자리,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서 있을 수 조차 없는 무서운 자리, 자신의 비참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면, 무섭고도 무서우신 나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반대하시는(against)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직 그분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임시방편, 버팀목을 만들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써 보지만 이내 곧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그 밑에는 지금도 시뻘겋게 타오르는 맹렬한 지옥이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이를 경험해 보셨나요?

 

만일 지금 이러한 상태에 있습니까? 자신의 죄악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 가운데 눌리고 떨고 있습니까?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면 상당히 신앙의 진보가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천국은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아직 없다면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율법의 무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끌고 내려가는, 뼈가 저리도록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앨 수 없다 하셨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했던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모세가 낫지!’ ‘모세의 율법이 더 쉬웠지!’ ‘모세의 율법은 힘들어도 지킬 수는 있잖아!’ ‘저분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단 말인가?’ 나사렛 예수는 모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부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 마음의 가장 깊고 은밀한 부분까지도 모두 밖으로 꺼내 드러냈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극도의 절망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절망을 덮어주고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완전히 밀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인이나 간음을 저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겉모습은 괜찮습니다. 그럴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 “너희 마음은 어떠냐!” “너희 마음은 깨끗하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잘 감추어져 있지만 사실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야수’와 같은 성향이 우리 속에 다 자리 잡고 있지요. 함께 오래 생활하다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간의 내면의 실상을 보고 놀랩니다. ‘아니 어쩜 저럴 수가 있어! 사람 속은 모르겠어.’

 

C.S.루이스(C.S.Lewis, 1898-1963)가 언젠가 자신의 속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곳은 다름 아닌 ‘사탄의 소굴’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사악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의 그 악한 마음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스스로 인식할 수도 없는 저 무의식의 밑바닥, 악마의 도가니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가끔씩 뛰어 올라오는 생각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섬짓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행동으로 다 옮겨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입니다. 여러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조건이 맞는다면 언제든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들이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억제하고 자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안에는 언제나 ‘반감’이 있습니다. ‘내 영혼 안에는 두 세력이 있어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롬7장) 죄와 싸우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적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실제적으로 느껴지게 되는데, 그 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롬7:10) 우리는 이 엄한 율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을 잊어버리면 지독하게 병들었던 우리의 모습을 잊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신 구세주가 나에게는 필요 없다는 착각에 빠져버립니다.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피 흘리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달아놓습니다. 잊지 않기 위함이지요. 십자가를 잊으면 당연시하게 됩니다. 내가 잘난 줄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날마다 서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습니다” 아뢰어야 합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 나타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다.”

 

루터는 ‘우리의 문제는 정말 심각하며, 그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절망하고 완전히 망했다고 느낄 때까지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 뭔가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게 하는 그 무언가를,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것과 싸워 주셔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붙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교만이 없습니다. 교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 서 있을 때, 오직 주님만을 붙들고 그분의 십자가만을 의지할 때 그곳에는 신비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우리를 망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내 안에 있는 ‘내가’ 끊임없이 들들 볶고 고발하며 나를 정죄할 때, 한밤중에 갑자기 저 무의식에서 뛰쳐나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저 깊은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죽음이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고, 모든 생은 허무하고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 속삭일 때 신비롭게도 저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예수님이 계신다.” 우리를 비웃듯 고난, 불행, 역경이 찾아와 요동케 하며,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향해 입 벌리고 달려들 때에도 그분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기, 이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나를 공격하는 그 모든 것들이 여기 이곳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사랑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힘을 잃게 됩니다.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여기 그리스도가 계신다.’ “여기 내가 있다.” 이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은 눈 녹듯 녹아지고, 안개가 사라지듯 사라져버립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 ‘여기 내가 있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하게 합니다. ‘여기에 내가 있다. 너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심장으로 우리를 맞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사랑으로 지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 높은 목표점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사랑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은 나를 얽어 맵니다. 억지로 하게 합니다. 그런데 억지로 하려다 보면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나 반항합니다. 명령은 전부, 즉 모든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절반이고, 나머지는 저항, 반항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릅니다. 사랑은 전부로 합니다. 모든 것으로 합니다. 사랑은 온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홀연히 찾아옵니다. 사랑이 먼저 마음에 찾아와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일어나는 기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심장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놓으신 그 심장을 봅니다. 그 심장은 지금도 뛰고 있습니다. 그 심장은 사랑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바라볼 때 알게 됩니다. 나는 이제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시내산의 우레와 번개는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우리는 이제 마음껏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것은 율법이나 명령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화답입니다. 화답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내 마음속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오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 율법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 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사랑이 흘러 우리 마음에 가득할 때 율법은 완성됩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능력과 힘, 돌보심으로 살아가는 곳에서 율법은 완성됩니다.

 

십자가가 참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나약함, 악함,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난 곳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곳입니다. 언제나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잊지 말고 또한, 주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주시는 사랑에 늘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때 율법은 완성됩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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