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주일설교
못 보는 이 보게 되리
성 경: 요한복음 9:1-41
설교자: 원영만 목사
설교일: 2020. 3. 22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4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5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1-41
거룩한 주일 하나님 전에 나와서 예배하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또한 각 처소에서 방송을 보면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어주신 본문의 말씀으로 『못 보는 이 보게 되리』 못 보는 이가 보게 되리라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12)
‘나는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12)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는다’(12)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요, 예수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곳은 헌금궤 옆이었습니다.(20)
왜 헌금궤를 특별히 말씀하셨는가 하면 당시 헌금궤는 황금등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초막절이었습니다. 초막절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 오기 시작하면 제사장들은 스물여덟 개의 황금등에 환히 불을 밝혔습니다. 광야 시절 한결같이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갈 길을 밝히 보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재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초막절에 성전은 이 불빛으로 매우 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밝히 타오르고 있는 그 황금등 옆에서 너희가 지금 이 빛을 보고 있느냐? 바로 ‘내가 세상의 참 빛이다’ 말씀하시고 계는 것입니다.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참 빛으로 나는 세상에 왔다 선포합니다. 어둠은 오직 빛으로 물러갑니다. 예수님이 참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15)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하려 하심입니다. 그분의 빛이 너무나 밝아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있는 그대로 모두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은 심판하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주님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밝은 빛 가운데로 나아와 그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9:1)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계신가 하면, 예수님의 시선은 눈먼 사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앞 못 보는 사람을 보고 계셨습니다. 불쌍한 사람, 병든 사람,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 악마에게 눌린 사람,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 병든 사람, 인생의 여러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 죄로 인해 눌려있는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배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예배하는 이들 가운데 연약하고, 병들고, 상한 이들을 주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놓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화려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병든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병들고 상한 마음을 걱정 두려움을 주님 앞에 모두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주님의 시선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 자체가 큰 은혜가 됩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 사람을 보고 있으니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까?”(2)
예수님께서는‘이 사람의 죄 때문도, 그 부모가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고 하시는 것이다’(3)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사도 요한께서 이 기사를 적은 것은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은 한 편의 설교입니다. 매우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즘 드라마로 이야기한다면 6개의 장면(scene)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면이 전개될 때마다 이 눈먼 사람은 점점 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예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라는 사람이’(11) 라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38) 하고 엎드려 경배하게 됩니다.
신앙은 성숙하고 자라나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샛길로 빠지게 된다고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했습니다. 샛길로 빠지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데,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시간이 지나면서 깊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이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오게 된다’(9)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이렇게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밤이 곧 오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기에, 우리는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 합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지금 아침을 당하였으니, 힘써 활동하고 돌진하라 했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돌진하소서. 남이 욕을 하든, 비방을 하든, 죽든지, 살든지 다만 돌진만이 형제에게 있을 때외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밤이 곧 옵니다.’ 머잖아 옵니다. 일할 수 없는 때가 곧 옵니다. 일할 수 있을 때 주님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일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이나 그냥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힘써 해야 합니다. 미루지 말고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안 한다고 함께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누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모가지를 드리우고’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으시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반죽을 하신 다음 그 반죽을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눈먼 사람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7)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눈먼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고 그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단순한 순종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곧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 주셨을 때 머뭇거림 없이 바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듯(창22:3) 말씀 주시면 곧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 분명히 그 자리에서도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눈 못 보는 이가 500m 넘는 실로암, 더듬거리며 내려가는 것 쉽지 않습니다. 눈에 잔뜩 진흙을 붙이고 내려갈 때 많은 이들이 조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겁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실로암,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가라시면 가야 합니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지 말고 핑계대지말고 주께서 명하신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눈이 열리고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순종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으신 분,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는 거룩한 물 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께로 가서 그분의 거룩한 물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밝히 보입니다. 자신이 깨끗하다,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씻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 씻으면 밝아지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 와이퍼로 앞유리창을 닦아야 앞이 밝히 보이듯, 매일매일 주께 나아가 닦아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그가 돌아오자 이웃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었습니다. ‘이 사람이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 아니냐?’ 하니 ‘맞아 바로 그 사람이야’ 하는 이들도 있고, 아니야 ‘그냥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야’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니 사람이 변했습니다.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전에 그 사람 맞어! 어떻게 이렇게 완전히 딴사람이 될 수 있어! 와! 새사람이 되었네! 이웃 사람들이 놀라 넘어지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합니다. ‘저 사람이 예전에 그 사람이 맞어!’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고 놀라움이 있습니다. 경외가 있습니다. 니키 검블(Nicky Gumbel)의 말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경외가 가득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9) 말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눈을 어떻게 뜨게 되었소.’ 그가 대답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11)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그는 아직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이 깊은 사람, 선하고 착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병들었기에 고쳐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심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나쁜 소문을 퍼뜨리자 백성들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민14:1) 주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모세에게 내가 전염병으로 이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 하셨습니다.(민14:12) 그때 모세는 ‘주님의 그 큰 권능’을 보여 달라고 탄원합니다.(민4:17) 주님의 그 큰 권능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그 큰 권능은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큰 사랑입니다.(19) ‘주님의 그 사랑’, 그 사랑이 주님의 크신 권능인 것입니다. 그 크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 권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입은 자들입니다.
1849년 미국은 콜레라로 온통 난리였습니다. 그해 7월에 뉴욕에서는 일주일에 거의 천 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맹인학교 교사로 있었던 파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그의 품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덜그럭덜그럭 미친 소리가 들렸습니다. 관을 가득 실은 마차입니다. 마부는 ‘시신을 가지고 오세요.’ 소리쳤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계속됐습니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그해 11월에 날씨가 차가워지자 차츰 물러서게 됩니다.
파니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나도 만일 죽었다면 과연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 하라고 하시는 건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힘없이 쉽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파니는 자신의 신앙을 깊이 생각해 보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았습니다. 인간의 명예가 죽음 앞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깊이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파니는 말수도 적어졌고, 의욕도 없어졌습니다.
어느 날 데오드르 캠프 목사가 부흥 집회를 하는 데 오라고 초청을 받았는데, 그런데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녀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녀는 이상한 환상을 보고 매우 분명한 꿈을 꿉니다. 그리고 다음 날 집회에 참석하게 되고 그날 회심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노래가 들려왔는데 그 순간 그녀의 영혼이 깨어났습니다. 그는 눈물을 많이 흘렸고, 심장은 고동쳤고, 천국의 밝은 빛이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할렐루야.’ “나는 그동안 한 손은 세상에, 다른 한 손에는 주님을 붙들고 있었단 말이야!” 고백하였는데, 그때 신비하게 세상을 향한 손을 놓아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자체가 그분의 은혜입니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심도 은혜요, 우리의 모든 죄의 허물을 아드님이신 예수께 모두 대신 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심도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된 그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려갑니다. 눈먼 사람이었다 눈 뜨게 된 그는 다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15) 이 일이 안식일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논쟁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했으니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죄인은 이러한 표징을 행할 수 없다. 의견이 확연히 갈립니다.(16)
예수님께서는 특히 안식일에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안식일, 즉 거룩한 주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아마 요한복음 첫 번째 독자들에게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이 병을 고치시는 날이다. 육신의 병도 고치고, 죄의 병도 고치고, 마음의 병도 고치신다. 주일은 축복입니다. 주일은 고침 받는 날입니다. 주일은 깨끗하게 나음 받는 날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세요. 주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로 작정하신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너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보게 된 이에게 묻습니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17) 보게 된 이가 대답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지금 보게 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의 부모들은 그들의 의도를 알았기에 자신의 아들이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하며 위기를 모면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아들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1)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직접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22)을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결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이 고백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이시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구원이 바로 예수이시다.’ 어둠의 세력은 그렇게도 이것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예수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분도 예수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시 눈뜨게 된 사람을 부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24)
바리새인들은 너무 쉽게 정죄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 장에서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8:15)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자녀는 정죄하려 합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정죄합니다. 사람이 정한 기준 따라 심판하다 보면 예수님도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어라고 정죄하고 심판합니까? 정죄하고 싶을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눈멀었다 보게 된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그의 경험을 매우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있어야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단 한 가지 아는 것은 그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
예수를 막 믿게 된 사람과 그의 친구가 대화를 나눕니다.
“그래, 자네 예수를 믿게 되었다며.”
“그렇다네.”
“그러면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좀 있나?”
“예수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모르겠네.”
“예수는 몇 살에 돌아가셨나?”
“모르겠네.”
“도대체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슨 뜻인가?”
“모르겠네.”
“아니, 예수를 믿는다면서 다 모르겠다니 도대체 자네는 아는 것이 뭔가?”
“자네 말이 맞네, 사실 나는 예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네.
하지만 내가 아는 게 분명히 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술주정뱅이였네.
술만 먹으면 아내에게 욕을 하고, 손찌검을 하고...
가족들은 나만 보면 피하고 무서워 벌벌 떨고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나는 술을 끊었네. 아니, 끊어졌어.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셨다는 것.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네.”
웨슬리 목사님 시대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때 변화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 노동자가 회심합니다. 어느 날 친구가 묻습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믿나?” 그때는 이성의 시대였습니다.
회심한 노동자가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어”
“내가 거기 없었거든.”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지.”
“우리 집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 집 술병을
모두 장식품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거야.”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 ‘광신의 본성’에서 정말 미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첫 번째가 자신은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자신이 크리스천인 줄 착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많아서 그 광신, 그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주위에 비슷한 사람이 너무 많아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탄식, 그리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자비로 자신이 해방되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면 그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체험이 없으면, 깊이 애통해야 합니다. 너무 낙망마세요. 괜찮습니다. 단지 구하십시오. 구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각한 체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을 붙들어 참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처럼 죄 가운데 죽습니다.(요8:23,24)
바리새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믿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못 믿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증거를 다 갖다 놓아도 못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눈 뜨인 사람이 대답합니다. “이미 말했는데도 당신들은 곧이듣지를 않으니,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다시 묻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여기에서 ‘도’는 영어로 ‘too’입니다. 이 말의 숨겨진 의미는 이 눈멀었다가 보게 된 이가 이미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자기 인식이 있었습니다.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욕설을 퍼붓습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28) 눈멀었다 보게 된 이는 ‘예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다른 이들도 인정합니다. ‘너는 예수의 제자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이, ‘너는 예수 제자구나’, ‘예수를 따르는 자구나’ 인정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의 가슴은 뭉클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 사랑하는 작전동교회 성도들은 ‘예수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사는 곳에서 모두 듣게 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우리는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29) 이야기하자, 보게 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하늘에서 오신 분이신가? 하는 질문은 계속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를 아버지께서 보내셨다.’(요16:28)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 하니 참으로 이상합니다.(30)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십니다.(31)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주셨다는 말을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32)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아무 일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33)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33)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맹인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주님께로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는 바깥으로 내어쫓습니다.’(34)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
쫓겨나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
주의 일을 하다 힘들 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주님을 향한 길고 긴 여정에서 낙심될 때 주님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너무 낙망하지 마세요. 주님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주님 일을 감당하다 보면 고통당하고 핍박을 받고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도 요한이 그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때야! “네가 나를 진심으로 믿느냐.” ‘아멘,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36) ‘그래, 내가 바로 그다.’(37) ‘그는 주님께 엎드려 절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예수라 하는 사람이’ 정도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하늘로부터 오신 분으로, 그리고 이젠 ‘주님으로’‘주’ 되심을 믿고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교부 크리스톰은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으나 주님께 돌아와 경배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주님으로 믿나이다.’
‘인자를 믿느냐?’(35)
‘선생님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36)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37)
“눈 열린 맹인은 예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영의 눈이 열려 그분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지금은 흔들리는 때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처럼 흔들리는 때에는 같이 흔들리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더욱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때에도 저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주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9)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오심으로 ‘심판’이 이미 임한 것입니다. 그를 받아들이는 이와 그를 거부한 이들이 분명히 갈리게 된 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이미 보고 있다’,‘그가 필요 없다’하는 이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그러면 우리가 ‘맹인’이라는 말이요? 따지듯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41절)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만일 그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면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요8:21) 예수를 보지 못하면 죄는 그대로 있을 것이요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요8:24)
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이 나면서부터 영적인 소경이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안다’(we know, 24, 29) 말을 반복합니다. 자신들은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41절에 본다(see) 말과 연결됩니다. 예수를 보지 못하면서 자신은 모든 것을 본다고 착각하면 주님께 나오지 않게 됩니다. 본다고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자신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실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늘 주님 을 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인생, 눈이 열리는 인생 되어야 하겠습니다. 못 보는 이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못 보는 이만이 보게 됩니다. 못 보는 이는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실로암, 보냄을 받은 이, 예수님께 나아오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환히 눈이 열려 마음껏 일하시는 작전동교회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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